필리핀 놀러 갔다 감옥행.. 한국인 노린 '셋업 범죄'

“형님, ‘공돈’ 500만 원이 생겼는데 필리핀 안 가실래요?”
지난 5일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서 탑승객들이 수속을 위해 줄 서 있다.
2019년 4월 25일,60대 A씨는 후배 B씨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평소 B씨가 주식투자를 대신 해준 터라 그는 의심 없이 필리핀행에 응했다. 열흘 뒤 두 사람과 또 다른 후배 C씨는 마닐라공항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야외 수영장에서 술을 마시던 이들은 현지 여성 5명과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하지만 객실로 이어진 술자리 도중 A씨가 잠깐 담배를 가지러 옆방에 갔다 온 사이 참석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몇 분 뒤 들이닥친 경찰은 그에게 미성년자 강제 추행 혐의를 씌워 유치장에 구금했다. 그때부터 후배들은 “미성년자 성추행은 최대 20년형”이라며 사건 무마 대가로 8억3,000만 원을 요구했다. A씨는 돈을 약속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A씨의 재산을 노린 ‘셋업(Set upㆍ함정)’ 범죄 일당이었다.
2018년 필리핀 마닐라 코리안데스크에서 국내 파견 경찰과 필리핀 경찰이 업무 협조 대화를 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표적 삼는 셋업 범죄가 다시 기승을 부릴 조짐이다. 셋업은 미리 정한 대상을 함정에 빠뜨려 석방을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는 범죄 방식이다. 요즘엔 한국인 관광객에게 미성년자를 접근시켜 성매매를 하게 하고 경찰 신고를 빌미로 돈을 뜯어내는 수법을 많이 쓴다.
경찰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관광길이 끊기면서 한동안 뜸하던 필리핀 셋업 범죄가 관광 재개와 함께 다시 고개를 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1~8월 필리핀으로 향한 한국인은 16만8,176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3,254명) 대비 5,068% 폭증했다.
사실 필리핀은 코로나19 전에도 셋업 범죄의 천국이었다. 2017년 1월부터 이달까지 셋업 범죄 관련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국내 수사를 거쳐 판결까지 내려진 사건은 총 9건이었다. 언뜻 적어 보이지만, 신고를 꺼리는 성매매 특성상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 관계자는 23일 “셋업 범죄는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건이 대부분인 ‘암수(暗數)범죄’”라고 설명했다. 실제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세부 분관은 코로나19 유행 직전인 2019년 홈페이지에 ‘셋업 범죄를 조심하라’고 공지하기도 했다. 한 외사 경찰관은 “태국, 캄보디아 등지에서도 셋업 범죄가 종종 발생하긴 하나 필리핀에 비할 바는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필리핀이 셋업 범죄의 온상이 된 배경은 복합적이다. 필리핀 사정에 밝은 복수의 경찰 관계자들은 “지리적 인접성, 유흥 문화의 발달, 뿌리 깊은 부패, 자유로운 총기 사용 등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2015년 5월 필리핀 현지에서 50대 한국인 관광객 4명을 상대로 이뤄진 셋업 범죄에는 이런 요소들이 모두 녹아 있다.